김규식 선생 졸업사진. [사진=VA 레아노크 칼리지]
독립운동가 김규식(Kim Kyu-sik, 1881-1950년) 선생이 버지니아 고속도로 아태계 역사기념인물로 선정됐다.
랄프 노덤 주지사는 “우리가 계속 포용적인 버지니아 역사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버지니아 학생과 교사들이 뛰어난 업적을 일군 아태계 위인들의 목소리를 발굴하고 전파하려는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그 결과 탄생한 5명의 버지니아 고속도로 아태계 역사기념인물이 탄생한 사실 또한 축하한다”고 전했다.
김규식 외에도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해군에 참전한 필리핀 이민자들(버지니아 비치),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을 졸업하고 NFL 최초의 아시안 출신선수를 지낸 일본계 애조 맛수(윌리엄스버그), 버지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20세기초 중국정치계에 투신한 W.W. 옌(샬롯츠빌), 1970년대 이후 보트피트로 정착한 북버지니아 베트남 이민자 커뮤니티(폴스 처치) 등이 역사기념인물로 선정됐다.
버지니아 주정부는 지난 5월 초중고교 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아태계 역사기념인물 공모전을 펼쳐 이들 5명을 선정했다.
김규식은 버지니아 컴벌랜드에 위치한 컴벌랜드 중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추천했다.
아티프 콰르니 버지니아 교육부 장관은 “이번 행사는 우리가 공유해야 할 역사의 이해와 깊이의 폭을 더했던 좋은 기회가 됐다”고 평가했다.
버지니아는 지금까지 2600개의 역사기념물 표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고속도로 역사기념인물 표식은 1927년부터 인물과 장소, 이벤트, 상징물 등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김규식 등의 아태계 역사기념인물은 오는 9월 버지니아역사유산위원회에 상정되고 10월 최종 승인 절차를 거쳐 확정된다.
김규식 졸업앨범(왼쪽 아래). [사진=VA 레아노크 칼리지]
김규식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미국인 선교사 H.G.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와 1903년 버지니아주 세일럼에 위치한 루터교 계열의 레아노크 칼리지에서 영문학 학사, 1905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아르바이트와 막노동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조달했으며, 재학 중 학교 잡지에 한국어와 한국에 대한 논문을 싣었다.
특히 1903년 학교 잡지에 실린 ‘러시아와 한국 문제’에서는 “한국정부는 무능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보수주의와 타성, 음모에 길들여져 반역자와 비겁자들로 가득 차 있기에 지금이라도 각성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외세의 병탄에 쓰러질 것”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는 연설경연대회에서 한국을 알리는 내용으로 최고상을 받는 등 이미 19세기말과 20세기초 버지니아에 한국을 알린 선구자였다.
김규식은 1905년 귀국해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으나 1910년 나라를 잃고 고심하던 중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해 본격적인 해외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선다.
김규식은 뛰어난 영어실력 덕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에서 활동했다.
김규식은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납북돼 1950년 12월 압록강 근처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