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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처참해진 북한인권 위해 “한·미 다시 뛰어주세요”

탈북민 손혜영 씨 본보 방문
‘새로운 희망, 고난의 세월’ 등 증언
박세용 기자
미국을 방문한 탈북민 손혜영(사진)씨가 본보를 방문해 새로 들어서는 윤석열 정부에 대한 기대, 북한 인권 개선의 시급함, 고난에 찼던 탈북 과정등에 대한 생각을 털어놨다.


2015년 대한민국에 입국해 정착한 손 씨는 지난 주 KCPAC 헨리 송 대외협력국장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연방의회와 국무부, 씽크탱크 관계자들과 면담했다.

손 씨는 “문재인 정권 하에서 탈북민에 대한 무관심과 억압이 심화됐다”면서 “탈북 단체들이 와해되고 코로나 사태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정권이 바뀌면서 기대가 높아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손 씨는 “미국 관계자들과의 면담과 각종 증언을 통해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직접적으로 알게 돼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면서 “스스로도 북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고 밝혔다. 손 씨는 “중국 내 탈북자 구출단체 등을 만드는 것”이 앞으로의 활동 계획이라고 말했다.

특히 한국을 우선 방문하는 바이든 대통령이 “북한 인권 문제와 김정은정권의 핵개발 저지를 위한 노력을 주제로 (윤석열 대통령과) 좋은 이야기를 나눌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손혜영 씨는 보다 많은 10~20대의 젊은 탈북자들의 미국 방문과 관계기관 증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현실과 ‘김정은 정권’에서 자라난 북한인들이 겪은 인권탄압 현실을 젊은 탈북민들이 증언해야 보다 효과적인 북한인권개선 정책이 수립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손 씨에 따르면 코로나 시대 이후 북한동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당시와도 닮았다. 김정은 정권은 평양 이외 거주 주민들에 대한 배급을 대폭 줄였고, 농업활동이 전무해진 평양 이외 주민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모진 삶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끝으로 손 씨는 워싱턴 동포들에게 “북한 인권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도록, 미국과 한국 정부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주시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단천시 검덕 광산에서 태어나 유년기와 청소년 시절을 보낸 손씨의 아버지는 감덕광산의 광부로 어린 시절은 배급도 넉넉해 별 다른 어려움 없었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함께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손 씨의 삶도 고단해졌다.

12살의 나이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먹을것이 없어 98년 어머니와 아버지가 연이어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북한 현실에 대해 손 씨는 “살아남기 위해 나무껍질이나 땅에서 자라나는 풀도 뜯어 먹으면서 배고픔을 견디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직한 일들이 제 눈 앞에서 벌어졌다”고 말했다.

손 씨는 “이곳에 계속 있으면 언젠가는 죽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고향을 떠나 북한 전역을 떠돌며 꽃제비(노숙자)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 전역에는 손씨와 같은 꽃제비들이 넘쳐났다. 너무 많아서 빌어먹고 사는 것도 경쟁이었다. 손 씨의 방랑생활은 10년간 계속됐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 손 씨는
검덕광산에서 광물을 훔쳐 팔며 돈을 모았고, 정식으로 ‘광석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국의 시범감찰에 걸렸고 또다시 꽃제비 생활을 시작했다.

손 씨의 삶은 2007년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으로 팔려가면서 다시한번 바뀐다. “북한에서보다 어떤 면에서 더 힘들었다”는 중국 생활을 손 씨는 악착같이 버텼다. 아이도 낳고 꾿꾿히 버틴 중국 생활은 그러나, 누군가의 밀고로 2012년 북송되며 산산조각났다.
보위부에 끌려간 손 씨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다. 기절할만큼 끔찍한 마약주사를 이용한 고문이 통상적으로 이뤄졌다. 맹장이 터지자 마취없는 수술까지 당해야 했다고 손 씨는 말했다. 공개 재판에서 2년 형을 받은 손 씨는 교도소로 향했고, 극심한 영양실조로 30Kg까지 살이 빠져, 그 덕분에 철조망을 빠져나와 재탈북에 성공했다고 증언했다.

그 후 신앙을 얻은 손 씨는 미국까지 오게 된 삶의 변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