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홍 시인을 추모하며
노세웅 시인
지난 2월 13일 저녁에는 ‘고 최연홍 시인 추모의 밤’ 행사를 워싱턴 문인회와 워싱턴 ‘윤동주 문학회’가 합동 줌미팅으로 했다.
시인을 사랑했던 유가족과 문우들이 모여서 고인의 시를 낭송하고 시인과의 추억을 나누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전역에서 칠십여명이 모여서 그의 뜻을 기렸다.
그 자리에서 유족은 조의금으로 ‘최연홍 문학상’을 제정하여 고인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시인은 이 세상에 없어도 그의 이름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지난 1월 6일 새벽, 최연홍 시인의 갑작스러운 비보를 듣고 나는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유명한 미국 존스합킨스 병원에서 수술 후 회복되고 있어 수일 내에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청천벽력이었다.
병원 가는 날 아침에도 이메일을 보내주었고, 일주일전에 만났을 때도 췌장암 환자 같지 않았다. 너무나 애통하여 의사가 실수를 하지 않았나 하고 의심해 보았지만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늘나라에서 그가 할일이 더 많아서인지 모르겠다.
그는 문학을 사랑하여 ‘워싱턴 문인회’를 만들고, 윤동주를 사랑하여 ‘윤동주 문학회’를 만들었다. 북간도 윤동주 생가에서 일본 후꾸오까까지 윤동주 시인의 삶을 찾아가 보는 순례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의 후배이며 연세대학 재학시절 등단한 원로시인이다. 일본의 윤동주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으며 금년 2월에는 릿교대학 윤동주 추모제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여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훌쩍 떠났다.
그와 나는 30여 년 동안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애통하기 한이 없다. 같은 교회에 다니며 교회 순모임에서 만나고, 문인회에 함께 나가며 문인들과 만나고, 운동을 좋아하여 매주 한두 번 골프장에서 만났다.
그는 모든 운동을 좋아했지만 골프, 야구, 농구를 특히 좋아하였고 손자와 농구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아직 할일이 많은데 훌쩍 떠나갔으니 남은 자들은 당황해하고 있다.
<윤동주 문학 2021>의 편집주간이 되어 원고를 쓰고, 원고 청탁하고 할일이 많은데 훌쩍 떠났으니 우리들은 어떻게 할지 모르지만 그의 뜻을 헤아려 최선을 다해야겠다.
지난 토요일에 하관 예배가 있었는데 마지막 모습대신 예쁜 항아리가 놓여있었다. 건강했던 그가 한줌의 재가 되어 항아리 안에 있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류응렬 목사님도 가족들도 애통해했다. 생전에 그의 행적을 회고하고 고인의 넋을 기렸다. 그날은 따뜻해서 하늘의 축복이라고 했는데 그날 밤에는 하얀 눈이 내려 그의 무덤을 포근하게 덮어주었다.
지난 1월16일에는 중앙장로교회에서 고별예배를 줌미팅으로 하여 미국과 한국에서 참여하여 고인의 넋을 기렸다. 그가 남긴 마지막 이메일에는 “노 형, 지난 30년간 한결 같이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으로 구역식구로 문우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어 주신 은혜, 처음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가까운 친구에게는 고맙다는 말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라고 적혀 있었다.
지난 가을 최 시인의 동네, 버크 레이크 공원에서 <윤동주 문학 2020> 외 다섯 명의 출판 기념회를 했다. 소년같이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시던 모습 눈에 선하다.
키모 테라피로 대머리가 된 모습이어도 젊은이 같이 활기찬 음성으로 ‘윤동주 문학 2020’에 이어 2021 2022...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던 시인의 말에는 문학 사랑이 넘치고 있었다.
한국의 유명 시인 정호승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윤동주 문학회’를 워싱턴에 창립하고 창간호 <윤동주 문학 2020>을 낸데 대하여 고인의 공을 치하하였다.
그의 베스트셀러는 <미국을 다시본다>로 다섯 번이나 거듭 인쇄를 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책에다 손수 도장을 찍으며 팔이 아프다고 하시면서도 행복해 하셨다.
그에게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다. 그는 미국 버지니아에서 서울로 통근하며 10년을 어머님을 모신 효자,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의 책을 안고 잠이 들고, 시인의 아버지는 묘비에 ‘시인의 아버지’라고 써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제사상 위에는 아들이 쓴 책들을 올렸다.
그는 전 세계의 문인들과도 교류했다. 미국 계관시인 그웬도린 부룩스, 리드 휘트모아, 리타 도브와 교제하였다.
인도 칼카타에는 ‘가을 어휘록 Autumn Vocabularies’ 애독자가 많았다. 그가 작년에 내놓은 ‘Five Boyhood Recollections of the Korean War 다섯 소년들의 한국 전쟁 회고록’ 전자책은 한국과 미국뿐 아니라 인도에서도 많이 팔려 나갔다고 한다.
신세대처럼 전자책을 내놓고 많지 않은 원고료지만 KDP.Amazon 아마존에서 보내왔다고 즐거워 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에도 그의 집에서 버크 레이크 호수로 가는 숲속을 매일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 아이들과 개울물 속의 물고기를 세어보고 다람쥐가 뛰노는 모습과 새들의 노래 소리 듣기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수놓았던 비둘기를 사랑했듯이 버크레이크 호숫가의 비둘기를 사랑하였다.
그는 신이 숨겨둔 우주의 신비를 찾아 시를 쓰기를 즐겨하였다. 그의 글 쓰는 양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매일 글을 쓰고 수시로 한글과 영어로 책을 냈다.
말년에는 영어로 쓰기를 좋아했다. ‘Snows of Kilimanjaro 킬리만자로의 눈’과 ‘Five boyhood Recollections of the Korean War, 1950-1953’이 작년에 나온 책이다.
‘The Forgotten War As Remembered by Korean Adolescents’는 금년 6.25 한국 전쟁 기념으로 내놓으라고 원고를 주고 가셨다.
최연홍 시인에 관한 글을 다 쓰려면 한이 없다. 그러나 이만 줄인다.
나는 그의 수많은 친구 중에 한 사람이지만 모두에게 스스럼없이 솔직하고 친절하게 대해준 것 같았다. 오래 함께 지내기를 바랐던 친구를 먼저 보내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다.
작년에는 ‘바람이 불어도, 폭풍우가 와도, 눈 폭풍이 닥쳐도, 우리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천국에 가서도 구역식구로 살아갈 것 같아...’라고 적어 보내 주었다. 그의 이메일은 잘 쓰여진 시처럼 보였다.
시인이여! 천국에 가서도 구역식구로 함께 살아가도록 먼저 가서 좋은 동네에 자리를 잡아 놓고 초대해 주소서. 슬픔도 아픔도 없는 천국에서 평안히 쉬소서. 마지막 이별이 아니고 잠시 헤어지는 것이겠지요. 그렇지요? 다시 만날 때까지 아듀!